코로나 이후 재택 근무에 완벽 적응한 서비스 기획자 트리님의 재택근무 3년차 일상. 출퇴근 없는 리모트 워커의 하루는 어떨까요? 트리님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일상을 살짝 소개해드립니다.
재택 근무에 발목 잡혀서 퇴사 못 한 사람, 나야 나
_
[재택근무] 집에 회사와 통신 회선으로 연결된 정보 통신 기기를 설치하여 놓고 집에서 회사의 업무를 보는 일.
코로나 전에 재택 근무란, 일부 IT 기업을 중심으로 마치 복지처럼 제공되던 근무 시스템이었다. 적게는 월 1회 많게는 주 1회 재택근무를 실시하는 곳들이 있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도 월 1회 원하는 날에 재택 근무를 실시할 수 있었다. 보통 날씨가 안 좋은 날, 출장 다녀온 다음 날 혹은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을 골라서 재택 근무를 했다. 주로 집에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모든 직원들이 같은 날에 재택 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날에 쓰다 보니 불편한 부분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zoom 사용이 아주 보편적이지 않았기에 특히 회의를 진행하거나 참석할 때 다소 번거로웠다. (대면 참석자와 비대면 참석자를 모두 고려했어야 해서 그렇다.)
2020년 2월에 시작된 코로나라는 전 세계적 재난은 이 원격 근무를 조직에 대대적으로 확대 적용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내가 속한 회사의 거의 모든 임직원들은 바이러스의 전염을 최소화하기 위해 2월에 본격적으로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나아질 듯 나아지지 않는 지긋지긋한 전염병 덕분에 회사는 약 2년 동안 ‘모든 직원이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업무 생산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가설을 검증해볼 수 있었다.
실험 결과, 재택근무는 개인 및 조직의 업무 생산성을 해치지 않았고,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원활하게 굴러갔다. 이에 따라 회사는 거리두기 정책과 무관하게 재택근무 제도를 지속하겠다고 공표하였다. (두둥) 이때 여기저기서 퇴사 의지가 싹-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뿐만 아니라 회사는 적극적으로 이 새로운 근무 제도의 확장을 검토했고 결과적으로 업무가 가능한 환경이라면 자택뿐만 아니라 국내 어디에서든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직장인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비 오는 날 신발 젖어가면서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삶, 연차 안 쓰고 제주도 한 달 살기, 점심시간에 내 침대에서 낮잠 자기와 같은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과도기가 있긴 했으나 재택근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약 3년 차가 된 지금 시점에서 나는 재택근무에 120% 적응한 상태이다. 오피스 출근과 재택근무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조건 재택근무를 선호한다. 물론 재택근무가 객관적으로 더 좋은 근무 형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내 성향과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했을 때 재택근무가 나에게는 더 잘 맞을 뿐이다.
재택근무자의 하루, 지옥철? 퇴근길? 그게 뭐죠?
AM 8:00 기상
티 타임 / 독서 / 유튜브 보기 / 멍 때리기 / 운동하기
…를 다하지는 않고 시간 되는 대로 그날그날 끌리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요즘은 주로 티 타임, 독서 그리고 유튜브 보기를 한다. 사무실로 출근할 때는 같은 팀 사람들과 티 타임을 가졌지만 요즘은 엄마 아빠와 티 타임을 가진다.
대체로 10시에 업무를 시작하기 때문에 9시 50분에 일어나도 상관은 없다. 실제로 그렇게 살았던 기간도 있다. 거의 세수만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근데 그렇게 살아보니까 뭔가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정신이 덜 깬 채로 업무를 시작하다 보니까 효율도 떨어졌다. 뭐라도 생산적이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에 업무를 시작하려고 하는 편이다.
AM 10:00 근무 ON (오전 업무)
팀원들과 눈 마주치고 인사하는 ‘출근 눈도장’을 찍는 과정 대신 사내 시스템에서 출근 도장을 찍고 업무를 시작한다. 재택근무가 시행되고 나서 우리 팀은 주 2회 오전 시간대에 화상으로 업무 진행 상황과 이슈들을 공유하는 스크럼 미팅을 진행한다. 내가 하고 있는 업무를 줄줄 읊는 것이 처음에는 좀 어색했지만 이제는 다 적응했고 오히려 이런 시간이 있음으로 인해 얻게 된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PM 12:00 점심시간
1) 집밥 먹기
나의 재택근무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엄마이다. 원래 집에 아무도 없을 때는 그냥 대충 김치랑 냉장고에 있는 반찬으로 점심을 드시거나 아니면 밖에서 동네 지인분들과 점심을 해결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재택을 시작한 시점에 마침 아빠도 점심 시간대에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고 아빠도 나도 집에 있다 보니까 점심 밥상을 ‘차려야’될 것만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지만 나랑 아빠는 단 한 번도 엄마에게 밥을 차려달라고 한 적이 없다. 아무래도 엄마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끼는 것 같다. 여하튼 엄마의 의무감 덕분에(?) 의도치 않게 불효녀가 된 나는 매일 맛있는 집밥을 먹고 있다. (엄마 고마워)
2) 운동/산책
점심시간의 헬스장은 사람이 꽤나 적은 편이다. 퇴근 후에 가면 너무 북적거려서 운동하기가 불편한데 점심시간에 운동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쾌적한 환경에서 운동이 가능해서 주로 점심에 PT 수업을 받는다.
3) 침대에 누워서 쉬기
앉아서 쉬는 것과 누워서 쉬는 것.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고 당연히 누워서 쉬는 것이 최고다.
PM 2:00 오후 업무 시작
(별 다를 것이 없는 오후 근무 시간)
PM 4:30 쉬는 시간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좋은 시간이다.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고 팀 그룹 챗에 메시지를 남겨두고 잠시 집 앞에 나가서 마실 음료를 사 온다. 만약 사무실이었다면 팀원들과 함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고 있었을 타이밍이었겠지?
PM 7:00 근무 OFF
사내 시스템에서 근무 종료 시간을 입력한다. 다음 글에서도 언급될 예정이지만 재택 근무를 하면 의외로 야근을 많이 하게 된다.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지만 진짜다. 그냥 정신없이 일을 쳐내다 보면 7시가 넘어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의 질을 위해서 의식적으로 추가 근무를 안 하고 특히 야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차라리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는 것을 선호한다.)
별 것 없다 ! 그리고 그게 재택 근무의 핵심이다. 출근 준비 시간이 없고 이동하는 시간이 없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시간이 없다. 없어져서 비어있는 부분들은 내가 스스로 나의 의지로 다 채워 넣어야 한다. (물론 빈 상태로 그냥 두어도 되지만.)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